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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나는 왜 늘 쫓겨다니는가

먼 종소리 2019. 10. 30. 17:03

고든 맥도날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오늘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벽걸이 TV에서 흘러 나오는 삼시세끼재방송을 보게 되었다. 아침부터 지단을 부치고, 당근을 볶으며 재료를 준비하여 두툼하고 먹음직스러운 김밥을 말더니, 시원한 어묵국과 함께 입 안 가득 김밥을 먹으며 멀리 산 한번 쳐다보고 서로 행복에 겨운 웃음을 주고받는 세 여자와 초대받은 한 남자. 그들의 모습에 보고 있는 내 입 속에도 침이 가득 고였다.

 

천혜의 자연 속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편안한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온갖 겉치레나 의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루 세 끼 뭐해 먹을까 만을 생각하며 갖가지 식재료로 건강하면서도 맛도 좋은 음식상을 뚝딱 차려내는 모습이 신통하면서도 괜시리 샘이 나기까지 했다. 

직장맘으로 살면서 가슴 한 켠이 늘 개운치 않고 뭔가 걸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아이의 먹거리다. 아침에 늘 시간에 쫓기면서 출근 준비와 아이의 유치원 등원 준비를 하는데 늘 아이의 아침은 전날 친정 엄마가 간식으로 사다 둔 빵이나 잼 바른 토스트다. , , 반찬이 올라간 아침상을 차린 건 유치원 입학 첫날과 둘째 날 정도였지 아마? 이러니 아이가 빵순이에 단짠 과자를 달고 살고, 살이 오동통 터질 것 같지.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또 우리 집 식탁 위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월요일에 빨지 못한 실내화를 또다시 가방에 넣어줄 때도 그렇고.

 

사실 나는 요리를 하는 시간이 늘 아깝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시간에 책을 한 자라도 더 보는 편을 택했다. 요리뿐만 아니라 가사 노동에 드는 모든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정리라는 말은 내 삶에서 점점 지워져 갔다. 책장에 책이 넘쳐나 여기저기 겹쳐서 쑤셔놓기 일쑤였고, (그 중 안 본 책도 허다하다ㅠㅠ) 온갖 브로셔, 책자, 노트, 교회 신문 등이 화장대에 쌓여 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분실하여 새로 책을 사서 반납한 적도 수 차례. 베란다에는 이사온 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풀지 못한 박스가 쌓여 있고 심지어 이사 후에 온갖 물품을 친정 엄마가 수납장에 가지런히 정리해주신지라 무슨 약이 어디에 있는지도 엄마한테 물어서 찾곤 했다. 남편은 나에게 수년 간 냉장고 정리 노래를 부르다가 아예 포기하고 이제는 혼자서 알아서 너무나 잘하고 있다. 내 탁상 달력은 온갖 모임과 강연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지만 막상 시작하고 끝맺지 못한 일들이 천지에다 정말 백만 년 만에 집에 있는 시간이 있다 한들 방전된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와 한 몸으로 뻗어있곤 했다. 아이를 재우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고, 블로그 글 한 편 써보자는 야심찬 계획이 무색하게 나는 늘 아이와 함께 (가끔은 아이보다 먼저) 잠들고 아침에 눈 뜨면서 한번도 열어보지 못한 노트북을 바라보며 자괴감에 애꿎은 허벅지만 꼬집었다. 뭔가 계속 내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는데 나는 늘 소화하지 못하고 더부룩한 상태로 하루 하루를 찜찜하게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주변 정리 정돈을 못하고 시간 선용을 하지 못하면서 일상의 갈무리가 전혀 되고 있지 못했던 건 내 삶 자체가 늘상 쫓겨 다니는 형국이기 때문이리라.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욕심에 쫓기고, 사람들의 기대와 인정에 쫓기고…… 쫓겨 다니는 사람은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따라 움직이고, 이는 마치 중독과 같다는 말이 충격적으로 가슴을 쿡 찌른다. 내 영혼은 그저 텅 빈 곳간이었던 거다.

 

내면 세계를 무시해오면서 내 삶도 싱크홀처럼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상태로 아슬아슬 지탱해온 게 아닌가 싶다. ‘텅 빈 영혼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맞닿아 있는 삶의 중심을 놓치고살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내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나는 그 영적 공간에 비축해놓은 게 전혀 없고, 이런 상황에서 내 삶에 어떤 제동이라도 걸린다면 나는 마치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공포에 떨었던 제자들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예수님만 흔들어 깨우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쫓겨 다니는가. 나의 내면 세계는 왜 그토록 무질서할까. 나의 내면에는 왜 그리 해결되지 못한 충동들이 가득 차 있는 걸까. 그래서 왜 주님의 음성도 잘 듣지 못하고 나 중심의 계획만으로 온갖 번잡한 일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걸까. 예수님처럼 폭풍 속에서도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 폭풍에게 잠잠하라 명하실 수 있는 그 절대적인 믿음은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걸까.

 

쫓겨 다니는 삶을 해결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을 가차 없이 파헤쳐야 한다고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질문에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하리라.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지, 왜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얻기 원하는지, 또 그 모든 것을 전부 빼앗긴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겠는지를 말이다.

 

나는 스스로가 쓸모 있고 어느 조직에서나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길 원하는데 이러한 자기 효능감이 내 삶의 큰 동력이 되어 왔던 것 같다.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존재만으로도 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막상 나는 무엇이든 기여를 통해 내 존재를 증명하고 확인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어릴 적 너무 빨리 첫째가 되고, 동생에게 무조건 양보하며 착한 행실을 함으로써 부모님한테 칭찬을 받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진정 이타적인 의도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선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가진 구제의 은사도 결국은 나의 의를 드러내려 함일 거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을 읽으면서 그리도 찔렸던 게 아닐런지. 맏아들처럼 나 역시 내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심보였던 것 같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저 칭찬해 주실거지요?’ 라면서 말이다.

 

나의 내면 세계의 질서는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동생에게 잘하기 때문에 날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내가 딸의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듯 날 낳아주신 분들은 그저 내 존재만으로도 내게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에게 잘하고, 봉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를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음을 끊임없이 찾고 이유를 대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사랑은 결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고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외부의 격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은 끝까지 나를 포기하시지 않는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내면의 정원에 그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 하나님을 초대하고 싶다. 홀로 고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쫓겨 다니는 자가 아닌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질서정연하게 내면 세계를 채우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비추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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