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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스토리 살롱 사후 과제

먼 종소리 2022. 12. 4. 16:27

‘아름답게 어긋난 경험’에 대한 레퍼런서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또 업무 시간엔 창고살롱 슬랙 접속하지 말자고 한 다짐이 무색하게 부담스러운 회의가 내일로 미뤄지면서 야호~ 외치면서 또 저도 모르게 여기로 들어오고 말았네요. 
어제 오랜만의 스토리살롱, 반가운 분들과 또 새로운 분들과 함께 책을 매개로 대화 나누는 시간 너무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제가 사후과제 첫 스타트 끊네요~


'아름답게 어긋난 경험'
젤 처음 떠오른 생각은 20대 후반 베프가 남친이랑 크게 싸우고 이젠 진짜 헤어질 거라며 저한테 대신 만나서 "이제 완전 끝이야"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요. 그 부탁을 들어준 결과는 어땠을까요? 결국 그 둘은 얼마 안 가 다시 만나고 동기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 아름다운 결론.. 남녀 사이는 절대 끼어들면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죠. 근데 좀 더 생각해보니 제가 번역과 관련해서 어긋난 경험이 있더라구요.


첫째 아이 3살 때, 육휴가 끝나고 복직을 했는데 그동안 너무 뒤쳐졌다는 생각에 이것 저것 배우고 싶단 열망이 터져 나와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어린이책 번역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어요. 영문과를 나와서 가끔 이런 저런 지인들의 부탁으로 조금씩 해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수업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는데요. 매주 짧은 동화나 그림책을 번역해 가는 숙제도 어찌나 버겁던지요. 문장 하나 번역하는데 적합한 단어를 골라야 하는 의사결정의 과정이 머릿속에서 쉼없이 이뤄져야 하다보니 금세 지치고 진도가 정말 안 나가더라구요. 책에도 나오지만 번역가의 임금이 높아지려면 결국 번역 시간을 줄여야 하잖아요. 근데 진짜 저같은 초짜는 한 페이지도 백만년 걸렸던지라 이 일은 절대로 본업으로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 실전 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마지막 시간에 제가 써낸 번역기획서가 괜찮다고 출판사에 보내보라는 강사님의 제안을 받았어요. 그 책은 한겨레 번역가그룹에 소개하지 않겠다고요. 그 말은 다른 번역가한테는 기회를 안 줄테니 출간하겠다는 출판사만 있으면 그 책의 번역은 제가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결국 그 기획서를 첨부한 메일까지 다 써놓고도 차마 보내질 못했어요. 지금 draft 메일함을 다시 찾아보니 2019년에 같은 작가의 전작을 출판한 출판사에 보내려고 본문까지 다 써놓은 메일이 있네요.


우선 번역 수업을 통해서 번역이 그냥 저같이 영문과를 나와서 영어를 쪼금 한다는 실력으론 어림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구요. 그러다보니 오역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어요. 청소년 소설이긴 했지만 꽤 긴 분량이 책이었고, 2-3 페이지 정도만 샘플 번역을 했을 때도 평소에 못 보던 단어가 너무 많아서 번역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홍한별 작가는 사투리 사전까지 주문해서 보고 고어도 검색을 통해서 알아내는 등 엄청난 노력을 하시던데요. 저는 그렇게 할만한 에너지도 없고 뭣보다 이 두 번역작가들처럼 열정이 막 솟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자세로는 번역은 안 된다, 오히려 내가 좋은 책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기로 했죠.


저와 번역의 어긋난 만남이긴 했는데요. 저는 그래도 번역을 공부했던 경험이 너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서 지금도 번역가들에게 관심이 참 많아요. 몇년 전 최인아 책방에서 장하준 교수님의 아내이시기도 한 김희정 번역가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 가서 번역 이야기를 듣는데 어찌나 좋았는지 몰라요. 영국에 사시면서 수십권의 책을 번역하셨지만 그 분도 오역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세상에 그렇게 저명하신 번역가님인데도 말이죠.


저는 그래서 지금은 일과 육아에 치여서 도저히 여력이 없지만 언젠가 정말 좋은 책을 만나면 번역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 한 켠에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살면서 그런 인생 책을 만나면 정말 꼭 한번 해보려구요. 그럴려면 원서를 많이 읽어야 할텐데 말이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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