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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스토리살롱 사전 과제

먼 종소리 2021. 12. 25. 05:09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p.258)


몇 주 전, '고마워서 그래'의 맛난 그래놀라와 함께 날아온 두란님이 고른 문장을 보고 <밝은 밤>에 대한 기대가 한껏 더 높아졌어요.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세상 살아가는 데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 문장을 보고 "아~ 정말 좋다!" 하며 빨리 소설을 읽어야지 싶었죠.


4대에 걸친 모녀 관계가 소설의 중심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삼천이과 새비, 영옥이와 희자, 지연이와 지우 혹은 정연, 이렇게 여성들간의 우정, 사랑, 우애 그런 따뜻한 관계에 더 마음이 실리더라구요.
새비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희령에 와서 삼천, 영옥 모녀와 해후하고 바닷가에서 천진난만하게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참 기억에 남아요. 삼천이는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하지만 새비는 그저 충분하다, 우리가 서로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달라고 하는데요. 저도 종종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때 놓친 그 기회가,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가질 수 있었던 그것이.. 하지만 '아깝다 vs. 충분하다' 어떤 마인드로 살아갈 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더 바랄 게 없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왔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 특히나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요. 짧은 시간이나마 사랑받았다는 기억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하물며 귀리와 같은 강아지도 그렇잖아요.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그렇게 부대끼며 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며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였어요.


표지부터 너무 예쁜 핑크빛이라 밝고 가벼운 이야기일까 싶었는데 웬걸 일제시대와 6.25를 지나는 모녀 4대에 걸친 대서사가 묵직하게 펼쳐지는 소설이었네요. 최은영 작가의 책읽아웃 인터뷰 영상에서 다른 작가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두고 이런 소설을 쓰면 여한이 없겠다.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던데요. 저는 <밝은 밤>도 그에 못지 않은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 시대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아주 개인적인 서사로 보여도 그 밑에는 우리 나라 근현대사를 다 관통하면서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 소설을 잘 안 읽었는데 오랜만에 창고살롱 덕분에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을 읽게 되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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