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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 스토리살롱 사후과제

먼 종소리 2021. 12. 25. 05:01

떠나고 싶다면, 떠나지 못 한다면, 떠나고 싶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이제껏 떠남에 대해 일종의 동경 같은 마음을 지닌 채 살아 왔는데요. 이사를 할 때, 유학을 갈 때, 이직을 할 때, 여행을 갈 때 등등 어딘가로 떠날 땐 늘 기분이 좋고,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음으로써 마음 상태가 초기화되면서 뭐든 새롭게 해볼 수 있겠다는 긍정 에너지가 샘솟곤 했어요.  이번 영화를 보면서 지난 제 모습을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저의 떠남은 도피와 같은 것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펀처럼 길 위의 삶을 home으로 받아들인, 진정한 노매드의 삶을 선망한 건 절대 아니었던 거죠. 그저 현재의 상태를 벗어날 수만 있기만을 바라는, 그러면 뭔가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서 오는 동경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퇴준맘'으로 사는 것도 퇴사를 하면 지금과는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한 줌의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조직 속의 일원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이름 석자로 온전히 독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희망사항인 거죠. 그런데 아직 나는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계속해서 그 시기를 늦추며 지내고 있었는데요. 뒤늦게 둘째를 갖고 출산 후 육아휴직을 하면서 퇴사는 더욱 더 머나먼 일이 되어 버렸어요. 아주 현실적인 이유로는 둘째를 또다시 직장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 상황이 되었거든요. 대기 중인 동네 어린이집은 언제 연락이 올 지 요원한 상태에서 우선 자리가 많이 있는 직장 어린이집을 다시 두드려야 할 것 같아요. (바로 내일부터 입소 신청기간이랍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모두가 퇴사해도 회사 어린이집에 애 맡긴 엄마들만 남아서 일하고 있을 거라는 우스갯 소리가 있어요. 첫째를 2년간 여기에 보내면서 출퇴근과 등하원을 함께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마땅히 대안도 없었기에 회사를 때려치고 싶은 적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아이를 생각하며 이를 꽉 물고 버텼거든요. 그런데 또다시 최소 2년은 퇴사의 욕구를 꾹꾹 누르면서 다시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지만요. 또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도록 동기 부여도 되니까요. 


제가 언젠가 퇴사를 하는 날이 온다면 그 때만큼은 절대로 도피성 떠남이 되지 않기를 다시 마음먹어 봅니다. 지긋지긋한 곳 떠나버리자..가 아니라 진짜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살겠어..가 될 때 미련없이 사표를 던질 날을 기대해 봐요. 펀처럼 정든 밴을 타고 정처없이 길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은 이번 생에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 발 붙이고 사는 이 곳에서 하루하루 여행자의 마인드로, 아이와 같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살아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비록 몸은 매여 있지만요. 


그리고 언젠가 두 아이가 성인이 되면 함께 떠나고 싶은 곳이 있는데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이들과 함께 걸어보고 싶어요. 내 품의 아이들을 떠나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길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내 안의 버리고 싶은 모습을 떠나 보내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야지 생각해 봅니다. (저희 소그룹 나눔 때 려진님이 큰 울림을 주신 말씀이어요.)


암튼 스토리살롱을 통해 참 좋은 영화를 보게 되어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우리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길 기대해봅니다. 이번 시즌이 끝나도 모두 See you dow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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