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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일에 대한 세상 친절한 안내서

먼 종소리 2019. 9. 29. 07:42

제현주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단비는 개미가 좋아, 베짱이가 좋아?"

한동안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빠져 있던 딸 아이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여지없이도 개미. 이유도 지극히 당연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하는데 베짱이는 놀기만 한다는 것. 순간 나는 발끈해서 말했다.

 

"단비야, 베짱이는 놀기만 한 게 아니잖아. 일만 하는 개미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잖아. 일만 하며 살면 얼마나 힘들어. 이렇게 개미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베짱이가 있었으니 개미도 열심히 일할 수 있던 게 아니겠어? 그리고 개미에게 고마운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다니. 이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닌데 베짱이 참 대단하지 않아? 개미처럼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베짱이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엄마는. 그리고 베짱이는 개미 같은 좋은 친구를 둬서 결국 따뜻한 집에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었잖아."

 

아이가 세상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개미 같은 우리네 삶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겨우내 풍족하게 먹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풍족한 먹이를 가득 쌓아놓을 수도 없는 우리 시대. 베짱이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나 표현할 재간도 없이 하루종일 일만 하다 결국 몸만 축나는 아닐런지.

 

이 책의 표현대로 지금은 개미가 버림받는 시대다. 성실성을 찬양하던 과거의 노동 윤리가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 그래도 성공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실하게 일해야 평가도 잘 받고 승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수십년 양파를 까다가 묘기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건, 그 자체로는 감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삶의 어떤 의미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물론 즐거움을 포기한 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며 같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의 숭고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다는 게 몸값을 올려가며 자리를 이동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표상처럼 되어 버렸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만 하더라도 한 팀에 오래 있는 직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니 팀을 옮기더라도 그저 근속 기간이 긴 직원들은 고인물이라는 표현을 쓰며 매도당하기 일쑤다. 그들은 실력은 없이 겨우 자리 보전만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라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한 업무만 오래 한 직원들은 그 업무를 누구보다 잘하는 전문가로 인정받기는커녕, 평가 점수도 잘 받기가 어렵고, 승진 누락도 많이 겪는다. 개미처럼 일했지만 돌아온 건 왜 허구헌날 그 먹이만 쌓고 있냐는 거다.  

 

최근에 나는 이런 개미들을 보면서 조직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나에게 과연 일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모순투성이 내 마음을 거울로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의 지점을 그 뿌리에 심겨진 마음까지 속속들이 파헤쳐서 꺼내보이는 이 책은 정말 요즘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책이었던 것 같다.  

 

2년여 정도 퇴사 준비생으로 살아왔다. 조직에서 버림받기 전에 나 스스로 당당하게 사표를 내고 내가 정말 주인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이 돈벌이라는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보람도 있고, 사회적 의미도 있고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 어디선가에서 그걸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콸콸 정도는 아니지만 물이 끊임없이 졸졸 흘러주는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놓고 그때서야 내가 돈벌이와 상관없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바빴다. 파이프라인도 만들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일도 찾아야 하고.

 

하지만 이 책에서 던진 질문, "당신이 벌고 싶은 그 만큼의 돈, 왜 그 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를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너무 막연하게 생각해온 게 아닌가 싶다. 나의 필요와 욕구에도 가격표가 있고 우선순위가 있는데 막연히 그것을 다 이루려면 지금 정도의 수입을 유지해야 하지 않나라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의 스토리는 필연적으로 일과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데 나는 과연 내 삶의 스토리를 어떻게 써나가야 할 지 깊게 고민해봤는지 돌아보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래서 자긍심과 자존감이 한 뼘씩 자라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가 나의 진짜 욕망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주는 일터를 꼭 찾고 싶다. 안 되면 내가 만드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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